㉭지와 희가 한창 졸업작품을 준비하던 어느날 승이 밀라노 가구 박람회 지원서 소식을 들고 왔다. 지는 책을 들추고 싶어하는 꼼지락이 담긴 무언가를, 승은 사용할 때의 무의식적인 습관이 녹아든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 둘을 합쳐 가구를 사용할 때의 무의식적인 습관이 종이 스택(stack) 형태의 가구를 변형시켜 감춰진 정보를 들춰내자는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여기서 습관이란 의자에 등을 기대거나 다리를 꼬거나 엉덩이를 비틀며 앉고, 바테이블에 슬쩍 몸을 기대는 몸짓을 말한다. 감춰진 정보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다들 한번쯤은 친구의 교과서 옆면을 비틀어 널찍하게 늘인 다음 ‘바보’라는 글자를 써넣어봤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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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서의 여백에는 불투명도 3% 정도로 ‘종이의 변신은 무죄! 종이, 어디까지 만들어봤나?’라는 문구를 적어넣으며 낄낄거렸다. 알아챈 교수님이 있었을까?
fig.1fi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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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Z의 시초, 첫 번째 프로토타입(fig.1)은 이렇게 생겼다. 미안하게도, 49동 4산디과방에 굴러다니는 22년도 졸업전시 도록을 난도질해 만든 정방형 종이조각들을 엮어 만들었다. 두 번째 프로토타입(fig.2)은 크기를 키워 방석 사이즈로 제작했다. 상하판은 포맥스를 고되게 잘라 만들었고, 중앙에는 A2 종이를 겹쳐 넣고, 붉은 운동용 고무줄로 전체를 엮었다. 만들고 보니 오므라이스였다. 높이가 얕아서 드라마틱한 움직임을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대충 엉덩이로 비볐을 때 원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가능성 정도를 확인한 지와 희는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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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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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성을 위해 상하판은 목재 CNC로, 기둥은 지관통으로 변경했다. 중간에 넣을 종이의 재질을 결정하는 일은 매우 까다로웠다. 소재의 마찰력이 의자의 움직임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얇은 종이, 케이크 판 등을 거쳐 가벼우면서도 마찰력이 적어 부드럽게 스치는 하드보드지를 최종 소재로 결정하게 되었다. 하드보드지를 관통할 기둥과 고무줄을 위해 도안을 그리고 도무송을 맡겼는데, 시중에 파는 지관통의 직경은 미세하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나머지 종이가 지관통에 끼어 버리는 사건도 있었다.(fi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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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구조를 만든 후에는 종이의 측면에 왜곡된/왜곡되지 않은/혹은 왜곡될 수 있는 이미지를 출력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다. 글자의 생김새, 사이즈, 자간과 행간, 틀어진 각도 등을 변수로 놓고 수많은 실험을 진행한 끝에, 지는 스텐실 최적화의 감을, 희는 스프레이질의 감을, 승은 망부석의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엉덩이 안 움직이고 타자치는 법을 터득했다.
(fig.8) 비닐로 포장된 지호쓰 커엽쓰. 사실 저거 내가 했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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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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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의 제작만큼 중요한 게 안전한 shipping을 위한 포장이었다. 출국 전날 밤까지 지희승은 마치 마약공장을 방불케 하는 현장에서 디지를 포장했다.(fig.10) 디지는 토막토막 분리된 채 랩에 수차례 싸여졌고, 총 네 개의 트렁크에 담겨졌다.
㉦내가 장담하는데 공항에서 우리 수하물을 보고 마약탐지견을 데려왔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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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전시를 마치고 DZ를 먼저 귀국시키기로 했다.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하기엔 너무 귀하고 연약하고 무거운 아이였기에. 공교롭게도 택배를 보내는 날 비가 쏟아졌다. 무거운 DZ를 들고 겨우겨우 우체국에 도착했을 땐 물에 담궜다 뺀 스펀지마냥 종이 상자가 눅눅해져있었다.(fig.11) 박스 테이프로 정성스럽고 무자비하게 방수 우비를 입혀준 뒤 DZ를 우체국에 남겨두고 떠났다.(fig.12) 한국까지의 긴 여정이 무사하길 바라며.
DZ를 실어왔던 캐리어 3개도 처분하기로 했다. 그 중 2개는 전시장을 철수하시던 분들께 곧바로 입양되었고(fig.13) 나머지 한 녀석은 밀라노 길거리에 남겨졌다.(fig.14) 부디 좋은 주인을 만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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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와 스튜디오 촬영을 했다. 어마무지한 짐을 싸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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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었다..